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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서울 토박이, 제주도에서 향수병에 걸리다

 
강아지는 어디를 가더라도 반려인과 함께라면 문제가 없지만, 고양이는 반려인보다는 원래 있던 공간이 중요해서 이사를 하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제주도로 이주하기 전에는 내가 서식 공간이 중요한 고양이 같은 사람인 줄 몰랐다. 2016년 12월에 이사했으니 이제 서귀포로 이주한 지도 3년이 조금 넘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마흔이 넘게 수도권에 살면서 서울 중심의 일상이 몸에 뱄다. 광화문과 종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광화문 일대의 옛 궁궐들, 성공회 대성당, 종로와 안국동을 잇는 길에 조용히 자리잡은 조계사로 산책을 다녔다.

청계천이 복원된 후에는 청계천변도 자주 산책했다. 개발되기 전 종로 뒷골목인 피맛골을 돌며 도랑의 흔적이 남은 오래된 길을 걸었다. 골동품 가게들이 늘어서 어둑하고 촌스럽던 인사동이 깔끔하고 세련된 상업적인 공간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직장이 있는 종로에서 출발해 청계천과 을지로를 가로질러 충무로 거래처까지 걸어 다녔다. 충무로의 거래처는 책의 모양을 잡는 디자인 회사였다. 충무로에는 책을 만드는 디자인집이 많았다. 옛날로 치면 인쇄판에 활자를 심는 식자(植字) 일이다.

충무로 길거리에서 그곳이 금속활자를 만들던 주자소 터라는 안내석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책 편집 디자인 회사가 몰려 있는 곳이 조선시대에 활자를 찍어내던 관청이 있던 장소라니. 나는 몇 백 년에 걸친 유산 사이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서울은 내게 고향이자 유적지, 놀이터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너무 크고 바쁘고 빨랐다. 집은 경기도 일산, 직장은 서울 강남의 선릉역 부근일 때는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출퇴근 왕복길만 네 시간이 넘게 다녀야 했다.

영등포구 당산역 근처에 싸게 얻은 전셋집에서는 밤새도록 88도로에 화물차 달리는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 9호선 개통으로 당산역에서 고속터미널역까지 13분만에 갈 수 있게 되자, 현실감이 들지 않고 공상과학 소설 속에 살고 있는 듯한 낯선 감각이 들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한두 번 가 본 지방 도시는 서울과 달랐다. 뭣보다 도시의 크기가 작았다. 광주 시내 기차역에서 외곽에 있는 무등산까지 천천히 달리는 시내 버스로 30분 남짓 걸려 도착했다. 광주역에서 무등산까지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길이 막히는 일도 없이 느릿하게 가며 광주라는 낯선 도시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대전이나 부산에 갔을 때는 그 지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대전은 엑스포, 부산은 해운대라는 식으로 피상적이기만 했다. '내가 사는 나라인데, 나는 어쩌면 이렇게 모르는 것일까?' 나 자신이 엉덩이를 깔고 앉은 작은 영역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대전이 고향인 친구는 서울 친구들이 대전 친구들보다 깍쟁이라고 했다. '서울 깍쟁이'라는 말을 나도 들어는 봤지만 그 말을 실감한다는 사람은 그 친구가 유일했다. 그만큼 주위에 지방에서 온 친구들이 드물었다. 마흔이 넘도록 나의 우주는 서울과 수도권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나 자신의 무지와 무관심을 깨닫기 전에는 답답한 줄도 몰랐다.

막연히 서울과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의 삶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제주도가 고향인 친구가 독서 모임을 제안했다. 뭔가 다른 삶을 꿈꾸는 비혼 30대부터 50대에 걸친 여성들이 모여서 책을 읽는 모임을 시작했다.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앞으로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같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많은 거리를 이동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삼 년에 한 번씩 컴퓨터를 갈아치웠고, 이동전화는 더 자주 갈아치웠을 것 같고, 하루에 한 끼도 내 손으로 해먹지 않으며,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냈다.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차와 집을 샀고, 그만한 여유가 없으면 소소한 전자기기를 마련하며 즐거워했다.

우리는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살 수 있을까? 직장에서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독서모임은 2년 정도 지속됐다. 그 동안에 한 친구는 직장을 바꾸었고, 다른 친구는 경력 사무직을 관두고 신입 제빵사가 됐고, 처음 독서 모임을 제안했던 언니는 귀농·귀촌 학교를 다니며 귀농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고, 나는 능력 있는 후임에게 일을 물려주고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우연치 않게 제주도로 이주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주의 목적지를 제주도로 정하고 반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와서 살 집을 알아보거나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4.3에 대해서도 그때 처음 알았다. 처음이라… 실은 <순이삼촌>도 읽었고 영화 <지슬>도 보았다. 하지만 4.3 박물관을 관람하고 나니 전에 안 것은 안 것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찾아온 향수병


 
지척이 바다 5분만 걸어나가면 강정천과 강정바다였다. 범섬이 보인다.
▲ 지척이 바다  5분만 걸어나가면 강정천과 강정바다였다. 범섬이 보인다.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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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살기로 하자 드디어 제주도가 구체적인 장소로 다가왔다. 2016년 12월 중순에 서귀포시 강정동에 있는 귤밭집 밖거리로 이사 왔다. 그해 겨울에 궂은 비는 어찌나 자주 내리는지, 유난히 소리가 울리는 지붕을 얹은 밖거리 집은 비가 오는 밤마다 떠나갈 듯했다. 외롭고 무섭고 슬펐다. 그때는 귤철이 뭔지도 몰라서 인적 없는 동네 길이 쓸쓸했고, 남들은 땀 흘려 수확에 힘 쓰는 때에 우리만 한가한 줄도 몰랐다.

그렇지, 나는 독서 모임을 함께한 언니 한 명과 같이 이주했다. 광활한 미국 중부에서 20~30대를 보낸 50대의 이 언니는 제주도의 자연이 마치 미국 같다면서 만족해 했다. 수도권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리지만 제주도의 자연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나였다. 향수병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서울이 계속 생각났다. 놀기도 하고 일하기도 했던 광화문과 종로 거리가 떠올랐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찾아가 기도했던 장소들이라든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던 맥줏집이라든가, 자주 갔던 빵집이라든가, 연극 한 편을 보고 나오면 뿌듯했던 대학로라든가, 지상으로 거대하게 입을 벌린 지하 1층의 광화문 교보문고라든가, 언제나 그 큰 책방에 반가운 마음으로 뛰어들어가던 나라든가.

어린 시절을 보낸 서울 서쪽의 산 아래 동네라든가, 들어서면 담 바깥의 대도시가 바로 멀어져 버리는 덕수궁의 푸르름과 축축함이라든가. 이제 나는 서울에 없고, 내가 있는 제주도에는 서울이 없었다. 어둡고 조용하고 달이 밝고 별이 총총한 제주도의 밤을 사랑했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이 그리웠다. 나는 고양이과였다.

* 밖거리

제주도 집에는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라는 구분이 있다. 모두 독립적인 살림이 가능한 집 한 채 한 채를 말한다. 다만 안거리집이 제일 크고 밖거리집은 안거리집보다 작고 단출하다. 보통 밖거리, 안거리가 있고 세번째 집인 목거리까지 있는 경우는 드물다.

아들이 혼인하면 밖거리집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아들 내외의 아이들이 늘어나고 커지면 부모와 아들네가 사는 집을 바꾼다. 아들네가 안거리로 들어가고 부모는 밖거리로 나온다. 부모는 한 울타리 안에 살지만 밥을 따로 해먹는다. 육지에서는 낯선 풍습이다. 시부모와 밥을 따로 해먹는다는 얘기가 이래서 나왔다. 때로 안거리, 밖거리, 목거리는 조강지처, 둘째 부인, 셋째 부인이 각각 사는 집이 되기도 한단다. 제주도에 남자가 드물어 그렇게 한 울타리 안에 살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