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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분노 살아 있는 한 ‘이 시대’ 전체는 불효자식이다”

고 임기란 민가협 초대의장은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목요집회에 보라색 두건을 쓴 채 빠짐없이 참가했다. 사진은 2003년 12월11일 목요집회 10년 500회 개근상을 받을 때 모습이다. 사진 박승환 <한겨레21> 기자

고 임기란 민가협 초대의장은 1993년부터 2013년까지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에서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 촉구 목요집회에 보라색 두건을 쓴 채 빠짐없이 참가했다. 사진은 2003년 12월11일 목요집회 10년 500회 개근상을 받을 때 모습이다. 사진 박승환 <한겨레21> 기자

지난달 30일 임기란(향년 90) 여사님이 별세하신 소식을 들었다. 지나간 한 시대 전체가 생각났다. 역사가 비틀어져서 거꾸로 뒤집힐 때마다 시대의 수렁에 몸을 던져서 사람들이 밟고 건너 가게 해주셨던 우리나라의 여러 어머니들을 생각했다. 임기란 여사님은 내 조국의 어머니다. 18년 전, <한겨레> 사회부 기자 시절,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요청으로 쓴 뒤 지금껏 묵혀놓았던 글을 다시 내놓는 까닭은 이 어머니의 ‘수첩'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으려는 뜻이다. 글 김훈 작가
임기란(왼쪽 네째) 어머니는 1986년 12월1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가협 2차 총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됐다. 전태열 열사의 동생 전순옥(왼쪽 둘째), 김종태 열사의 어머니 허두측(왼쪽 다섯째), 송광영 열사의 어머니 이오순(맨오른쪽)씨 등이 보인다. 기록사진가 박용수씨가 찍었다.

임기란(왼쪽 네째) 어머니는 1986년 12월12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민가협 2차 총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됐다. 전태열 열사의 동생 전순옥(왼쪽 둘째), 김종태 열사의 어머니 허두측(왼쪽 다섯째), 송광영 열사의 어머니 이오순(맨오른쪽)씨 등이 보인다. 기록사진가 박용수씨가 찍었다.

임기란 여사(72)는 민가협의 어머니다. 1985년 막내아들 박신철(서울대 경제학과 3학년)씨가 민정당 가락동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임 여사는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의 구별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해말 민가협이 결성되었고 이듬해부터 임 여사는 상임의장을 4번이나 맡았다. 민가협의 젊은 어머니들도 상임의장 자리가 너무 힘들어서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상임의장은 자꾸만 임 여사에게로 돌아왔고, 임 여사는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그후 임 여사의 생애는 양심수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어렵고 거친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임 여사는 낮 시간의 대부분을 거리에서 보냈다. 매주 탑골공원 앞에서 모이는 목요집회를 주도하는 것은 기본이고 구속자 면회, 공안기관 규탄 집회, 석방 요구 집회, 농성장 위로 방문, 관련 기관 항의 방문, 거리 시위를 이끌어나갔다. 임 여사의 생애는 사랑이 곧 분노이며, 분노가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을 억압하는 현실의 굴레에 대한 분노인 것이다. 그 분노 앞에서는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의 구별이 무너진다. 분노는 사랑을 보편적이게 한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이 세상의 두꺼운 철벽을 조금씩 허물어내기 시작했다. 그 분노는 세상의 상처를 모두 끌어안아 자신의 상처로 삼는 어머니의 사랑이고 어머니의 힘이다. 그 어머니의 사랑과 분노는 늘 억압적인 시대의 맨 앞장에 서 있었고, 그 앞장에서 눈비에 젖었다. 군사정권이 퇴진하고 문민정부가 국민의 정부로 바뀌었어도 어머니의 분노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 어머니의 분노가 살아있는 한 이 시대 전체는 그 어머니의 불효자식일 것이다.
지난 4일 가족들이 유품 정리중에 찾아낸 고 임기란 어머니의 ‘수첩 일기’ 가운데 2007년 어느날, &lt;한겨레&gt;와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연설 등에 대한 연급도 보인다. 사진 박신철씨 제공

지난 4일 가족들이 유품 정리중에 찾아낸 고 임기란 어머니의 ‘수첩 일기’ 가운데 2007년 어느날, <한겨레>와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 연설 등에 대한 연급도 보인다. 사진 박신철씨 제공

임 여사에게는 오랜 세월을 간직해온 두 권의 수첩이 있다. 그날 그날의 일과 느낌을 적은 메모나 일기와 같은 수첩이다. 2002년 내가 민가협 총무 남규선씨와 함께 임 여사 댁을 방문했을 때 임 여사는 그 두 권의 수첩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아니, 그런 궁상맞은 물건을 뭐하러 들춰 보는가”라면서 임 여사는 웃었다. 그것은, 놀라운 문건이었다. 시대의 고통을 현장에서 헤치고 나간 한 늙은 어머니의 사실 기록이었다. 개인의 느낌도 간략히 기술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 나라 온갖 수사기관, 정보기관, 경찰서의 전화번호와 담당자 이름, 여러 인권단체, 관련 국회의원, 변호사, 기자들의 연락처와 구속된 학생들의 이름 학교 집주소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날 그날 벌어졌던 일들이 꼼꼼히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수첩 두 권을 빌려서 집으로 가져와서 며칠동안 한 줄씩 읽었다. 그 수첩 속의 글들은 현실과의 싸움에서 얻어낸 작은 것들과 얻어내지 못한 더 큰 것들을 정확히 기록했고, 작은 것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바쳐야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수첩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어머니의 분노는 하나로 합쳐지면서, 현실 속의 실천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나는 이 짧은 글을 써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 수첩을 읽어 보려한다.
임기란(맨오른쪽) 어머니가 1995년 8월8일 민가협 어머니들이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며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둔 모형 감옥을 부수고 있다. 기록사진가 박용수씨가 찍었다.

임기란(맨오른쪽) 어머니가 1995년 8월8일 민가협 어머니들이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며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둔 모형 감옥을 부수고 있다. 기록사진가 박용수씨가 찍었다.

임기란 어머니가 1998년 3월13일 대전교도소 앞에서 비전향장기수 특별사면 탈락을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임기란 어머니가 1998년 3월13일 대전교도소 앞에서 비전향장기수 특별사면 탈락을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1999년 3월17일=1. 서울구치소 면회(오전 9시30분) 2. 국방부 앞 항의집회(오후 3시) 12명 참가 3. 오늘 지출 영치금 2만원, 교통비 5천원(이상 공적지출), 점심값 1만원(사적지출) *내 사적인 지출을 줄여야겠다. 이날도 임 여사의 하루는 바빴다. 아침에 구치소에 갔다가 오후에 국방부 앞에서 집회를 가졌다. 영치금으로 2만원을 넣어주었다. 임 여사는 이날 1만원으로 점심을 먹었다. 무언가 좀 비싼 음식을 먹은 모양이다. 그래서 임 여사는 “내 사적인 지출을 줄여야겠다”라고 적고 있다. △1999년 3월21일 최의건 수병(1998년 서울대 천문학과 재학중 입대)(해군 함정에서 고참 상병에게)맞아 죽었다. 침통하게 예배를 드렸다. 원통하다. 누가 자식 키워서 군대 보내고 싶겠는가. 정 박사님이 부검에 입회했는데, 역시 두개골 파열이라고 하신다. 이날 이후 임 여사의 메모는 최의건 수병의 장례식, 항의 집회, 국회의원을 찾아가 호소하는 일로 계속된다.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 중인 의문사 유가족협회를 방문하고 위로도 했다. 임 여사는 이 사건을 뒤치다꺼리하다가 3월26일 병이 났다. 병이 나면 언제나 남편 박희봉씨가 자동차에 태우고 운전해서 병원에 간다. 병원 뿐아니라 박희봉씨는 아내가 가는 곳이면 으레 운전을 해서 데려다 준다. 3월26일에도 임여사는 최의건 수병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호소하기 위해 국회를 방문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고 몸에 병만 났다. 3월26일의 메모는 짤막하다. “분하다. 다리가 몸시 저렸다. 아빠와 같이 양재동에 가서 지압받고 밤 늦게 돌아왔다.” △1999년 4월9일 아침 10시부터 저녁 4시까지 대검찰청 가서 검찰총장 면담을 요청했다. 총장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안3과장을 만났으나 반응이 시큰둥했다. 추운 식당에서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 5시에 명동성당에 갔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단식을 이어갈지 걱정이다. 저녁때는 문익환 목사 방북 10주년 기념식(성공회대성당)에 갔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바쁜 하루였다. 검찰청을 방문한 일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모양이다. 임 여사는 이날 자장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날 기록을 보면 임 여사는 공적으로 3만7천원을 지출했고, 사적으로 1만700원을 썼다. 공적지출은 문 목사 방북기념식에 낸 축의금과 회원들을 위한 차비였고, 사적지출은 빵값과, 집에 돌아올 때의 교통비였다. 임 여사의 어려운 날들은 계속되고 있다. 명동성당에서 학생들의 농성은 계속되었고, 정치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전 단식 때는 남규선 총무가 농성장에서 기절해서 백병원으로 실려갔다. “분하고 또 분하다”라고 임 여사는 날마다 썼다. 임 여사는 큰 솥에 죽을 쑤었다. 학생들이 단식을 끝냈다. 임 여사는 이 허기진 학생들에게 죽을 먹였다. 한총련 학생들 300여명이 임 여사의 죽을 먹고 단식을 끝냈다. 이날 죽을 퍼줄 그릇과 숟가락이 모자라서 이 물건들을 마련하느라고 임여사는 공금 1만6천원을 지출했다. 4월 24일의 일이었다. 그날도 임 여사는 밤늦게 귀가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신문의 학생기자가 임 여사를 찾아와서 민가협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이 젊은 학생기자는 임 여사에게 너무나도 당혹스런 젊은이였다. 그날 메모는 이렇다. △ 2000년 2월15일=아침 10시쯤에 부산에서 대학신문 학생기자가 나를 찾아왔다. 민가협에 대해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도중에 학생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비전향 장기수가 뭐예요?” 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하면서, 이 대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하는지를 생각했다.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날 임 여사의 메모를 보면 임 여사는 학생기자에게 비전향 장기수의 배경과 실태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부산에서 온 학생기자가 돌아갈 때 차비로 2만원을 쥐어 준 것으로 되어있다. 가르쳐주고, 차비까지 보태줘서 돌려보냈다. 임 여사는 자주 아프다. 몸이 쑤시고 무릎마디 관절이 아프고, 어지럼증도 있다. 병원에 갈 때는 늘 남편이 자동차를 운전해서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온다. 노부부만 사는 집이라서, 임여사가 아프면 밥하고 반찬하고 집안 청소하는 일은 모두 남편의 몫이다. 2000년 11월24일 임여사가 김장을 담그는 날이었다. 노부부만 살아도 임 여사는 김치 욕심이 많다. 많이 담가서 며느리한테 나누어준다. 김장 담글 때도 며느리들은 다 모이라고 해서 함께 일한다. 김장 담그는 날 임 여사는 또 병이 났다. 그래도 김장을 단념하지는 않는다. 그날의 메모는 다음과 같다. △ 2000년 11월24일=아침 9시40분이 지나서 머리가 빙빙 돌고 사지에 힘이 빠지면서 어지러웠다. 겨우 일어나 마루에 나가 앉았다. 비가 오락가락했다.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찬조연설도 거절했다. 간신히 일어나 김장 담글 계획을 세웠다. 배추는 1천원에서 1천5백원으로 올랐다. 총각김치도 담글 작정이다. 계획을 세워주니까 남편이 모두 사왔다. 남편과 함께 배추를 다듬었다. 내일은 며느리들을 다 모이라고 했다. 남편은 힘이 들어서 이제 그만 하자고 했다. 몸이 아파도 아직도 김장 욕심은 남아있다. 그러나 못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임 여사는 그해 순을 맞았다. 임 여사는 집에서 가족들끼리 모여 순잔치를 했다. 집에서 떡을 하고 닭튀김을 만들었다. 임 여사의 메모에 따르면 순잔치에는 220만원이 들었다. 그 이틀 전에 임여사는 경동시장에 가서 푸성귀를 사서 김치를 미리 담가두었다. 칠순잔치날의 메모는 다음과 같다. △2000년 9월14일=70살이 되었다. 하하, 오래 살았다. 주님의 돌보심으로 오늘의 이 임기란이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50살을 못채우고 돌아가셨다. 죽을 때까지 남편과 함께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저녁 6시에 온 가족들이 다 모였다. 많은 덕담과 축복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이렇게 키워주시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많았다. 할렐루야, 아멘. 임 여사의 속상하고 분한 날들은 한도 없이 계속되고 있다. 마음이 상한 날들은 늦게 집에 돌아와 남편의 수발을 받으며 끙끙 앓는다. 임 여사를 속상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철벽과도 같은 제도와 법률과 고정관념이다. 속상한 날들의 메모는 너무나 많다. 그중 몇가지를 추려내면 다음과 같다. △2000년 11월19일=오늘 법원에 갔다가, 한나라당 여자 당원들과 싸웠다. 우리 보고 영원한 빨갱이란다. 저 고질적인 사고방식은 죽어야 끝나지 싶었다. 세상에서 아무리 목청 높이 외치고 다녀도 도저히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사고방식이 한심스럽다. 밤새 앓았다. △2000년 6월20일=종로거리에서 서명을 받았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통일이고 뭐고 아무 관심 없었고 젊은이 몇 명이 서명을 했다. 종로까지 가는데 길이 밀렸다. 하루 종일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절뚝거리며 돌아왔다. △2000년 7월17일=매향리 미군기지 철폐투쟁에 앞장섰던 사람 6명이 연행되었다. 남편을 졸라서 운전을 하게 했다. 매향리에 갔더니 경찰이 나를 막았다. 겨우 헤치고 들어가서 면회를 했다. 현장에 남아서 농성을 계속하는 사람들을 뒤에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 11시30분이었다. 왜 이다지도 힘이 드는 것일까. 왜들 이러는 것일까. △2001년 2월28일=오후 2시에 319호 법정으로 병문이 재판 방청을 갔었다. 6년을 구형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6년이 지나면 저 젊은이도 늙고 힘없는 학생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앞길이 걱정이다. 병문이 어머니가 한사코 1만원을 주어서 귀하게 받았다. 그렇게 분하고 속상한 날들이 계속되어도 임 여사는 그 상심을 다시 행동으로 바꾸어낸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과 분노다. 임 여사의 행동은 그 사랑과 분노를 합쳐내는 것이다. △2001년 12월21일=오늘 2시에 의문사유가족들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에 갔었다. 왼쪽 오금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송건호 사장님이 돌아가셨다. 진관 스님과 함께 문상을 다녀왔다. 너무나 어지러워서 혼났다. 부축을 받으며 지하철을 오르내렸다. 눈이 내렸다. 눈 녹은 물이 시꺼맸다. 남편이 검은 눈을 걱정했다. 유가족 농성장에 성금 5만원을 냈고 송 사장님 빈소에도 부의금 5만원을 냈다.
임기란(앞줄 오른쪽 둘째) 어머니는 남편 박희봉(앞줄 왼쪽 둘째)씨와 사이에 다섯 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박신철(뒷줄 왼쪽 둘째)씨와 사위 배철수(뒷줄 오른쪽 세째)씨 등 온가족이 함께 한 1999년 가족사진이다. 사진 박신철씨 제공

임기란(앞줄 오른쪽 둘째) 어머니는 남편 박희봉(앞줄 왼쪽 둘째)씨와 사이에 다섯 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박신철(뒷줄 왼쪽 둘째)씨와 사위 배철수(뒷줄 오른쪽 세째)씨 등 온가족이 함께 한 1999년 가족사진이다. 사진 박신철씨 제공

임 여사는 2002년 2월 가족 19명과 함께 괌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5박6일에 걸친 여행이었다. 이 여행에 관한 메모는, 임 여사의 많은 메모들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이다. △ 오래 걷고 다리 아프고 힘들었다. 다 늙어가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저 집에 무사히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아이구 힘들어!
임기란 어머니는 2006년 12월 세계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국내 처음으로 인권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임기란 어머니는 2006년 12월 세계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국내 처음으로 인권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기란(오른쪽) 어머니가 2010년 5월20일 13년째 800회를 맞은 목요집회 때 범민련 남측본부와 석방 장기수들로부터 축하와 감사의 화환을 받고 있다. 사진 &lt;한겨레&gt; 자료사진

임기란(오른쪽) 어머니가 2010년 5월20일 13년째 800회를 맞은 목요집회 때 범민련 남측본부와 석방 장기수들로부터 축하와 감사의 화환을 받고 있다.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임기란 어머니는 2017년 11월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주는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말년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됐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임기란 어머니는 2017년 11월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불교인권위원회에서 주는 ‘불교인권상’을 받았다. 말년의 마지막 공식 활동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 여사의 메모는 삶의 구체성으로 충만하다. 거기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다 기록되어 있다. 같은 회원들끼리 의견 충돌로 말다툼한 이야기, 면담에 나온 정부 관리들의 시큰둥하고도 건방진 낯빛, 민가협 활동으로 움직일 때 쓴 모든 경비, 지하철 요금, 함께 먹은 수박값, 농성학생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느라고 쓴 비용들이 구멍가게 장부처럼 낱낱이 적혀있다. 싸우다 병들고 병에서 회복되어서 또 거리로 나가는 이야기들이 아무런 수사적 장치의 도움이 없이 사실 그대로 적혀 있다. 그리고 이 수많은 구체성들은 사랑이 분노로 전환되고, 그 분노가 다시 사랑으로 바뀌는 과정의 증거들이다. 아, 우리는 삶의 구체성, 삶의 현실성 위에서만 사랑을 분노로 바꿀 수가 있다. 임여사의 메모를 다 읽은 후에 나는 남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잘 못 살아온 것 같아” 그러자 남규선은 깔깔 웃었다. 남규선의 웃음소리는 너 쌤통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메모를 돌려들릴 때, 나는 다시 임 여사를 만나야 한다. 이 귀한 메모를 임 여사는 “궁상맞는 물건”이라고 말한다. 메모를 빌려주셔서 여러 사람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해주신 임 여사께 감사드린다.
임기란 어머니는 2005년 3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에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참여해 검찰 개혁과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임기란 어머니는 2005년 3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에 민가협 회원들과 함께 참여해 검찰 개혁과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임기란 어머니가 2005년 3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때 이소선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임기란 어머니가 2005년 3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때 이소선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강기훈씨는 지금도 임기란 어머니의 수첩 일기에서 적힌 자신과 관련한 메모를 찍어서 지니고 다닌다. ‘화-강신욱 대법관 반대 기자회견’은 2000년 7월 시민단체들이 1991년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유서대필 조작사건’ 때 강씨를 구속시켰던 강신욱 검사의 대법관으로 임용을 반대하고자 열렸다. 사진 강기훈씨 제공

강기훈씨는 지금도 임기란 어머니의 수첩 일기에서 적힌 자신과 관련한 메모를 찍어서 지니고 다닌다. ‘화-강신욱 대법관 반대 기자회견’은 2000년 7월 시민단체들이 1991년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유서대필 조작사건’ 때 강씨를 구속시켰던 강신욱 검사의 대법관으로 임용을 반대하고자 열렸다. 사진 강기훈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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