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서사’가 경제를 움직인다

행동경제학자 로버트 쉴러의 ‘서사 경제학’ 기획
미국 경제 뒤흔든 9가지 영속적 내러티브 제시

내러티브 경제학: 경제를 움직이는 입소문의 힘 로버트 쉴러 지음, 박슬라 옮김/알에이치코리아·2만2000원 ‘영끌.’ 20~30대가 영혼까지 끌어모을 정도로 대출 받아 서울·수도권 아파트를 샀다는 뜻이다. 이 신조어는 지난 한 해 경제와 부동산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아파트 값 급등에 따라 자가 미보유자는 ‘벼락거지’로 전락하게 된다고 20~30대가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언론 보도와 입소문 등으로 회자됐다. ‘세금폭탄.’ 노무현 정부가 종합부동산세를 만들자 널리 회자된 이야기다. 세금이 폭탄처럼 떨어진다는 비유법이 실제 벌어지는 일인 양 받아들여졌다. 종합부동산세는커녕 소득세도 한 푼 내지 않는 이들까지 세금폭탄 공포에 시달렸다. 당시 세제를 비롯한 경제정책은 세금폭탄론에 영향 받아 후퇴했고, 세금폭탄 이야기는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자주 부활을 시도해왔다. 영끌과 세금폭탄 이야기가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야기가 경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쉴러 미국 예일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런 ‘이야기’에 주목한다. 사실이나 현상과 관련한 일정한 줄거리나 이야기, 서사를 의미하는 내러티브가 경제학 영역에서 주요하게 연구돼야 한다는 논지를, 그는 <내러티브 경제학>에 담았다. 행동경제학을 이끌어온 주요 학자로 2000년 ‘닷컴 버블’의 종말과 2006년 부동산 폭락을 예견한 그는 특히 인간의 감정이 재무적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이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기존 전통 경제학과 달리 인간의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천착해왔기 때문이다. 비합리적 결정이 큰 영향을 미치는 경제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망하려면 사람들의 비합리가 반영된 대상을 연구해야 하며, 이 대상이 내러티브라는 점에서 ‘내러티브 경제학’이 필요하다는 것이 쉴러의 생각이다. 내러티브의 핵심 요소는 ‘전염성’이다. 영끌이나 세금폭탄 이야기가 확산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내러티브는 다양한 과정을 거쳐 사람들에게 퍼져나가며 힘을 얻고 영향력을 발휘한다. 쉴러는 이 책에서 비트코인을 내러티브 전염성의 대표 사례로 소개한다. “비트코인 투자가가 최첨단 기술을 발견해 부자가 되었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는 “비트코인 내러티브가 지닌 엄청난 전염성”의 원인 중 하나다. “신기술을 쥔 사람이 승자가 될 것이라는 새로운 내러티브”는 “정기적으로 비트코인의 가격변동을 알려주는 정기 뉴스로 더욱 강화되고 비트코인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가치에 대한 인식은 또다시 비트코인 가격을 변동시키고, 그러한 가격 변동은 전염성 있는 내러티브를 창조하며 또 그 안에서 번창한다.” 최근 1비트코인이 5만달러를 넘어서고, 생활 영역 곳곳에서 비트코인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는 것 등이 내러티브의 작동원리는 물론 경제현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여준다. 모든 내러티브가 영끌이나 세금폭탄, 비트코인 같은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내러티브는 전염도 되지만 1차, 2차, 3차 감염 등을 거쳐 소멸되기도 한다. 마치 감염병처럼 말이다. 쉴러가 제안하는 내러티브 경제학의 방법론은 다른 여러 학문 분야에서 가져오는데, 전염병학을 쉴러는 이 책의 부록에서 내러티브 경제학에 접목시킨다. 복잡한 수식을 사용해 설명하고 있지만 기본 모형은 이렇다. “거의 모든 전염병이 소수의 최초 감염군에서 시작해 처음에는 상승했다가 종국에는 하락하는 언덕 모양의 패턴을 따른다. 시간이 오래 지나 질병의 위력이 감소한 시점에서 변이가 발생한다면 새로운 개인이 새 변종에 감염될 수 있다.” 여기에서 전염병 대신 내러티브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쉴러는 이뿐 아니라 역사·사회·인류·심리·종교·문학, 마케팅과 정신분석, 신경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통섭을 통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대기획을 제안한다. 여기서 나아가 정기적인 설문조사 및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 일기·설교·편지·소셜미디어·상담기록 등 문헌의 광범위한 수집과 분류 등을 통해 정량적, 장기 시계열 분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1980년대 초 경제학자 칼 케이스와 함께 만든 ‘케이스-쉴러 주택 가격지수’처럼 경제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 경제학은 실천적 분야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가 경험한 바 있는 의도적인 내러티브 조작과 기만을 더욱 잘 이해하도록 돕고, 경제 정책을 수립할 때 내러티브를 고려하도록 보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3부 ‘영속적 경제 내러티브’다. 미국 경제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강력한 9가지 내러티브의 사례를 제시하며, 이 내러티브들이 어떻게 경제에 영향을 미쳤는지, 어떻게 지속되거나 소멸되고 변종으로 부활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로 20세기를 배경으로 하며, 쉴러의 핵심 연구 분야이기도 한, 많은 연구자들이 매달렸으나 뚜렷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20세기 초 미국 대공황이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해부된다. 공황과 신뢰, 근검절약과 과시소비, 금본위제와 금은복본위제 등의 상이한 내러티브가 어떤 맥락에서 반작용이나 상호작용을 이루며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는지 살피고, 노동절약 기계, 자동화와 인공지능, 부동산 시장의 호황과 불황, 주식시장 거품, 보이콧·폭리취득자·악덕기업, 임금-물가 상승의 악순환과 사악한 노조 등의 내러티브를 광범위하게 다룬다. 쉴러가 제시하는 영속적 경제 내러티브는 미국의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금본위제와 금은복본위제는 오늘날 미국 달러를 둘러싼 논란과 무관치 않으며, 노동절약 기계와 자동화·인공지능의 내러티브는 보편적 기본소득제 논의의 뿌리를 드러낸다. 부동산 문제는 한국경제의 가장 뜨거운 감자이며, 주식 시장 활황이 거품인지 여부는 ‘빚투’와 ‘스마트 개미’ 등 다양한 내러티브가 작동하는 증시를 떠올리며 곱씹을 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1932년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한 끼를 해결하려는 이들이 미국 뉴욕 무료급식소 앞에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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