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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까지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랑받던 ‘흔한 사람’ 송해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송해길’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송해길’을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S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2016년, 종로문화원은 서울 종로2가 낙원동 골목에 ‘송해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붙였다. 탑골공원 옆 육의전빌딩 옆길에서 시작돼 낙원상가 초입에서 끝나는 이 240미터 남짓한 골목에는, 송해가 생전 출근했던 ‘원로연예상록회’ 사무실부터 그가 즐겨 찾던 식당과 그가 애용하던 이발소 등이 밀집해 있다. 흥미롭게도 이 골목 안에는, 송해의 흉상이 두개나 있다. 송해길 중간쯤 있는 파고다 건물 앞에 하나, 송해길 끄트머리 종로3가 지하철역 5번 출구 앞에 하나. 살아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명예도로명이 붙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흉상이 서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좁은 간격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흉상이 두개나 서 있는 건 분명 드문 일이다. 나는 송해길을 지날 때마다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보통 이 정도 밀집도로 살아 있는 사람의 흉상이 서 있는 거는 전체주의 국가의 권력자들이 부하들을 시켜서 억지로 만들게 했을 때에나 누리는 호사거든. 그런데 송해 선생님은 아직 살아 계시는데다가 정치권력을 쥐신 분도 아닌데 이런 밀집도로 흉상이 서 있단 말이지. 그러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야?” 가장 흔하고, 가장 평범했던 스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송해라서 그럴 법한 일이기도 했다. 송해는 단 한번도 ‘비싼 사람’이나 ‘저 멀리 있는 스타’가 아니었다. 송해는 자택이 있는 도곡동에서 종로3가 송해길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매봉역에서 종로3가역까지 한번에 움직이는 3호선을 애용했다. 그가 즐겨 갔던 국밥집은 5000원 안쪽으로 국밥에 반주를 곁들일 수 있는 저렴한 서민 식당이었고, 그의 단골 이발소는 4000원이면 커트를 할 수 있는 집이었다. 다른 이들과 부대끼는 게 싫어서 비싼 돈을 주고 ‘프라이빗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 값비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의 재력에서 안도감을 얻는 이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송해는 옆자리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혀가며 가장 흔하고 값싼 자리를 고집했다. 송해가 95살을 일기로 별세한 지난 8일, 소셜미디어에는 “어디어디에서 송해 선생님과 마주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거나 “송해 선생님 사인 요청 드렸을 때 너무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송해길에서 선생님을 자주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같은 증언들이 우후죽순으로 돋아났다. 송해길을 지나다니다가 우연히 송해와 마주친 시민들은 너나없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는데, 송해는 이런 부탁을 불편하다고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젊은이들의 유행에도 민감했던 사람이라, 사진만 봐도 대충 어느 시점에 찍힌 사진인지 짐작하는 일이 가능할 정도다. 아, 이 사진은 턱 밑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드는 게 유행일 때 찍으신 거구나. 이 사진은 손가락 하트가 유행할 무렵에 찍으신 거구나. 그러니까, 송해는 흔했다. 송해도 평범한 우리 사이를 격의 없이 다녔고, 우리도 매주 일요일 점심이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방송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송해를 드물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골목에 흉상이 두개나 있는 것도 송해라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람이 그처럼 어렵지 않게 흔했을진대 하물며 흉상이야. 그 흔함은 단점이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는 송해가 무언가의 1인자여서 좋아했던 게 아니다. 지금은 모두가 ‘세계 최고령 텔레비전 쇼 진행자’라는 기네스 타이틀로 송해를 기념하지만, 송해는 한번도 당대의 1인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세대로 데뷔한 악극단 출신 한국 코미디언 1세대들에서는 한국 코미디의 아버지 ‘막둥이’ 구봉서와 ‘후라이보이’ 곽규석, 코미디 천재 배삼룡이 있었다. 가까운 후배 세대로는 1970년대를 풍미한 애드리브의 천재 서영춘이 있었고, 악극단 출신 코미디언 계보의 끄트머리에는 이주일이라는 거인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심형래, 최양락, 주병진, 이경규, 전유성과 같은 새 세대의 코미디언들이 등장해 한국 코미디의 체질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장수 진행자로서의 아이덴티티로도 그렇다. 권위로 보면 한국방송 <가요무대>를 진행하고 있는 김동건 아나운서가, 강력한 자기 색깔과 “최종 결과~ 몇 대 몇!”이라는 유행어로 보면 한국방송 <가족오락관>의 터줏대감이었던 허참이 더 존재감이 강했다.
2003년 북한 평양에서 송해가 ‘평양노래자랑’을 진행하는 모습. 티브이 화면 갈무리

2003년 북한 평양에서 송해가 ‘평양노래자랑’을 진행하는 모습. 티브이 화면 갈무리

‘전국노래자랑’ 그 자체 같던 사람 송해는 마치 자신이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 같은 사람이었다. <가요무대>처럼 유명한 가수들이 나와서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도 아니고, <가족오락관>처럼 당대의 스타들이 출연해 재미있는 게임쇼를 펼치는 것도 아닌 쇼, 엠넷 <슈퍼스타 케이>나 <쇼미더머니> <스트릿 우먼 파이터>처럼 당대에 몇 안 나오는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숨 막히는 서바이벌 쇼가 아니라, 그냥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흥 많고 끼 있는 평범한 이웃들이 평범한 재능을 뽐내는 쇼 말이다.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모두 껄껄 웃고 어깨춤을 추는 싱거운 동네잔치 같은 쇼. 그게 <전국노래자랑>이었고 송해였다. 세상이 압도적인 재능과 화려한 매력을 지닌 이들의 비범한 경쟁에 환호하며 문자 투표를 할 때, <전국노래자랑>만큼은 ‘땡’과 ‘딩동댕동’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줄이며 평범한 이웃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그 자리는 진행자 자신이 빛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자리다. 주목할 만한 것 없는 장삼이사들이 무대 위에 선 3분가량만큼은 그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자리 아닌가. 그래서 송해는 자기 자신이 빛나는 대신 출연자들과 농담을 섞고, 그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받아먹는 것으로 자리를 지켰다. 생전에 자신이 키가 작다는 것을 농담의 소재로 삼아 “자신은 단 한번도 누군가를 내려다본 적이 없다”고 말한 송해답게, 송해는 출연한 이들과 격을 맞춰 옆에서 함께 놀았다. 장애인과 어린이들의 프로그램 참여를 독려했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떠난 어울림을 추구했다. 송해가 영원한 현역일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흔함 덕분이었다. 자신을 향해 반갑다고 다가오고 끌어안고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는 사람들을 매주 만나야 했던 사람답게, 송해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과 흔하게 즐겨 어울렸다. 그 덕분에 송해는 자기 세대의 유행이나 관점에 갇힌 채 업데이트가 중단되는 일 같은 건 겪지 않았다. 특정 세대나 특정 시대의 1인자였던 적이 없었기에, 송해는 그 세대나 시대를 대표하고 대변해야 할 책무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보다는 당장 다음주 녹화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 어떤 말들을 나눌지가 더 중요했다. 송해는 32년간 매주 자신의 견문을 업데이트했고, 출연자들에게 오늘날의 세상 사는 분위기를 배웠다. 그가 최신 세대의 유행어를 거부감 없이 구사했던 것, 손가락 하트를 마치 자신이 발명한 사람인 것처럼 능숙하게 해 보였던 것의 비결이 거기에 있었다. 별세 직후 온라인에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던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송해의 발언도 그 맥락에서 바라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 퀴어 골목은 송해길과 바로 맞닿아 있고, 송해는 수십 년간 한국의 퀴어들이 그 일대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벌이고 무지개 깃발을 내걸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다. 전국 각지의 광장에서, 장터에서, 골목에서 평범한 이웃들에게 배워온 송해의 세계는 그만큼 광대하고 편견이 없었으니, 남들이 낯설고 다르다고 배척하기 쉬웠던 것들도 송해에겐 ‘배울 게 또 많’은 무언가였다. 2018년 한국방송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송해는 퀴어문화축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들도 남녀 쌍쌍으로 있지만, 그렇지 않은 모임이 세계적으로 운동이 있죠? 퀴어축제. 그런데 거기 가면 정말 발 디딜 데가 없어요. 새로운 문화가 되었다고. 옛날 같으면 어른들한테 혼나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나와서 박수도 쳐주고… 어르신들이요. 그러니까 거기 가서 배울 게 또 많아. 젊은이들의 세계에, 야, 이런 변화도 우리가 한번 체험을 해보는구나. 그러니까 참 기분이 좋습니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송해길 인근에서 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송해길 인근에서 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7년 전 쓰지 못했던 글 이제서야 송해가 별세한 직후, 송해길에는 수많은 이들의 헌화와 조화가 모여들었다. 생전에 함께 인연을 쌓았던 연예인 동료와 후배들은 물론, 대통령부터 전직 총리에 이르기까지 정치인들의 조전들도 쌓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종로의 퀴어들이 붙인 펼침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송해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함께여서 즐거웠습니다. ―종로 이웃 성소수자 일동” 한국 사회 권력의 최고 정점에서부터,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존재할 권리를 위해 투쟁 중인 약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경계 없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 그건 송해부터가 사람을 좌우로, 동서로, 위아래로, 세의 크고 작음으로 나누지 않고 두루 어울렸던 ‘흔한 이웃’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흔함이 송해를 귀하게 만들었다. 갈수록 원자화되고 끊임없이 분열하는 시대에, 그렇게 흔한 이웃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어른이란 얼마나 귀한 것이었나. 7년 전쯤, <한겨레> 토요판은 내게 명절 특대판에 싣고자 하니 송해에 관해 써달라고 청탁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감히 나 같은 애송이가 그의 삶을 올바르게 담아낼 재간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차마 엄두가 안 나 쓰지 못했던 러브레터를, 고인의 영전에 뒤늦게 올린다. 선생님과 같은 시대를 살 수 있어서, 선생님이 매주 호명하며 안녕을 물어보신 ‘여러분’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