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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라서, 여성이라서…강탈당한 약자의 몸

이시드로 데 비욜도, 검은 다리의 기적, 1547년께, 다색목조각, 스페인 바야돌리드 국립조각박물관.

이시드로 데 비욜도, <검은 다리의 기적>, 1547년께, 다색목조각, 스페인 바야돌리드 국립조각박물관.

☞한겨레S 뉴스레터 구독하기 https://bit.ly/319DiiE 13세기 이탈리아 제네바의 주교였던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가 편찬한 그리스도교 성인전 <황금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들의 수호성인인 코스마와 다미아노가 어느 날 암 때문에 왼쪽 다리가 완전히 썩어버린 백인 남자의 꿈에 나타나 그를 치료해주는 기적을 행한다. 연고와 외과용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난 성인들은 백인의 다리를 잘라내고 최근에 죽은 에티오피아 사람의 다리를 붙여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의식을 회복한 백인 병자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병이 나았다”고 외쳤다. 에스파냐의 조각가 이시드로 데 비욜도(1500?~1556)는 1547년께 완성한 <검은 다리의 기적>에서 이 극적인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암을 앓고 있는 백인 곁에 나타난 성인들은 이미 그의 다리를 잘라내고 에티오피아 사람의 검은 다리를 조심스럽게 접합하는 중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침대 밑바닥에는 흑인이 다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비욜도는 ‘죽은’ 흑인의 다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흑인의 다리를 백인의 삶을 위해 붙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는 흑인이 살아 있든 죽은 상태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백인 환자가 성인들의 은총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에티오피아인의 다리는 백인에게 일어난 기적을 알려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의 몸은 강탈당했던 셈이다. 토실토실한 부잣집 아기의 비밀 오랜 시간 동안 약자들은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몸은 강자를 위해 손쉽게 이용당하곤 했다. 비단 인종적 약자뿐만이 아니다. 여성의 몸도 가부장제 존속을 위해 지속적으로 강탈당했다. 분유가 발명되기 전, 만약 산모가 산후에 사망하거나 혹은 모유가 나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 신생아에게 젖을 줄 유모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모가 충분히 수유할 수 있을 때도 귀족, 부르주아 상층계급은 유모에게 아기를 위탁하곤 했다. 1780년 파리에서 2만1천명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중 1만7천명의 영아가 시골에 사는 유모에게 맡겨졌으며 2년이 지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골로 보내지 않은 아기 중 약 700명은 집에 고용된 유모의 젖을 먹었다. 그렇다면 유모가 대신 젖을 먹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유하면 여성의 출산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성 가부장 입장에서는 유모를 두면 아내가 더 빨리 다시 임신을 할 수 있고, 자신은 더 많은 아이를 가질 수 있었기에 손해 볼 게 없었다.
에티엔 오브리, 유모에게 고하는 작별, 1776~77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클라크 미술관.

에티엔 오브리, <유모에게 고하는 작별>, 1776~77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클라크 미술관.

태어나자마자 생모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이, 그 아이를 거둬 젖을 주고 키운 유모. 이 둘의 관계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프랑스의 화가 에티엔 오브리(1745~1781)의 <유모에게 고하는 작별>에서도 이들 사이의 끈끈함을 엿볼 수 있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생모가 시골에 왔다. 낳자마자 시골 유모 집에 맡긴 아이를 건네받기 위해서다. 이제 당나귀를 타고 도시로 돌아가려는데 아기는 생모의 품에서 벗어나 유모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버둥거린다. 양쪽에는 이 모든 광경을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생부와 아기와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유모 남편이 서 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따로 있다. 그림 속에 유모 친자식의 존재가 소거됐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사람의 젖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유모가 부잣집 도시 아기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전에 아기를 낳아야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빅토르 브로샤르는 1872년 아동보호회 연례회의 강연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유모의 아기는 어찌 될지, 여러분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다른 아기에게 젖을 떼게 한 것은 아닌지 여러분은 몇번이나 자문해보셨습니까? 어떤 지방에서는 유모의 아기가 현장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64%에 달하고, 87%에 달하는 지방도 있습니다.” 여러명의 토실토실한 아이들이 사는 부잣집 대가족은 시골의 가난한 아기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더 노골화된 여성 몸 착취 분유가 발명된 후, ‘젖어미’ 같은 모성착취 사례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은 해방되었을까? 아니, 요즘 여성의 몸은 성차별에 더해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이 교차하는, 더 노골적인 전쟁터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리모’다. 대리모 사업은 난임 커플이 다른 여성의 자궁을 계약·대여·매매해 수정란을 이식하고, 임신 및 분만을 위탁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도 대리모 출산의 청정구역은 아니다. 2017년 한국 커플이 네팔에서 대리모를 통해 출산한 사례가 있음을 외교부가 직접 확인해주는 일도 있었다.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리모 사업의 특징은 미국, 캐나다 등 아이를 원하는 부유한 나라의 커플이 인도, 네팔 등 가난한 나라 여성의 자궁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대리모는 거의 예외 없이 의뢰인보다 더 낮은 사회경제적 계층에 위치하고 또한 대체로 더 ‘낮은’ 인종적 위계상에 위치한다. 부유한 백인 여성이 대리모가 되어 가난한 흑인 커플의 아이를 낳아주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특기할 사실은 대리모 사업을 옹호하는 쪽이 그 이유로 자신의 유전자(남성의 정자)를 가진 아이를 갖고자 하는 열망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즉 대리모 출산은 부계 ‘혈통’을 지키기 위해 모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제의 폭력’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대리모 같은 소리>의 저자 레나트 클라인의 말처럼 말이다. “불임인 이들이 다른 제3자 여성의 포궁(자궁)과 난자를 빌려서까지 ‘자기’ 아이를 낳고자 하는 욕망은 근본적으로 남성의 것이며 이 절차가 보장하는 것은 ‘대리모를 의뢰한 남성’의 유전자인 것이다.” 이때 가난하고 어두운 피부의 여성은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환원될 뿐이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문명 세계가 멸망한 이후의 세계를 그린 에스에프(SF)영화다. 우리는 팝콘을 먹으며 이 영화를 관람했다. 그런데 영화가 그려내는 약자들의 상황은 되짚어볼수록 그리 가볍지 않다. 독재자 임모탄에게 사로잡힌 맥스는 임모탄에게 충성하는 다른 인간 ‘워보이’를 살리기 위한 피주머니가 되어 천장에 매달린다. 아내들은 건강한 아기를 낳기 위한 인큐베이터가 되며, 여성들은 식량자원이 된 모유 생산을 위해 감금된 채 유축기를 몸에 달고 강제 착유당하는 신세다. 다리를 빼앗긴 에티오피아인, 모유를 내어준 가난한 유모, 자궁을 판 대리모가 겹쳐 보이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매드맥스>는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잘 보여준 영화로 꼽히지만, 사실은 약자의 몸을 강탈하는 현실 세계를 핍진하게 그려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