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logo
star Bookmark: Tag Tag Tag Tag Tag
Korea

2천원에 행복 한 그릇…종로를 깨우는 해장국집


우거지 해장국을 9년째 2000원에 파는 가게가 있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근처에서 무려 68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원조 소문난집국밥` 얘기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지만 이곳 해장국 가격은 더디게 올랐다. 1980년대 500원, 1990년대 초 1000원, 2000년대 1500원을 거쳐 2010년에서야 겨우 지금의 가격이 됐다. 싸고 맛있는 한 끼를 찾아 가게에 온 주머니 가벼운 손님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변하지 않은 따뜻한 인정 때문일까. 가게는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룬다. 새벽 4시 30분 졸린 눈을 비비며 찾아오는 택시기사와 일용직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리어카 행상꾼, 탑골공원 어르신, 추억을 찾아온 직장인 등 다양한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린다. 서로가 낯선 이들이지만 닳고 닳은 둥근 나무탁자에 나란히 앉아 국밥을 먹다 보면 어느새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서민들은 이곳에서 얼큰한 국밥을 먹으며 그날의 피로도, 가슴 아픈 고민도 같이 넘겨버린다.

주인장 권영희 씨(72)는 하루 종일 가게 입구에 놓인 거대한 솥 앞에 선 채로 우거지얼큰탕을 끓여낸다. 뜨거운 불 앞에서 무더위를 어떻게 견디느냐는 질문에 권영희 사장은 "이 집 참 맛있다고 한마디 건네는 손님 덕분에 참을 수 있다"며 웃었다.

―`소문난집국밥`의 시작이 궁금하다.

▷시어머니가 1951년 1·4후퇴 때 피란을 내려와 낙원동 이 자리에 가게를 처음 열었다. 그때는 백반집으로 시작했다. 그 뒤로 평양냉면을 팔다 나중에는 추어탕을 내놓았다. 나는 여기서 일한 지 47년 정도 됐다. 스물다섯 살에 시집 와서 1970년대 초반부터 가게 일을 도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게를 물려받았고. 한동안 추어탕·해장국을 같이 팔다 이제는 해장국인 우거지얼큰탕만 팔고 있다.

―원래 가게 이름은 `소문난집추어탕`이었다. 가게명을 바꾸고 추어탕을 더 이상 팔지 않는 이유가 뭔가.

▷가격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예전부터 우리는 국산 미꾸라지와 야채만 썼다. 하지만 재료값이 막 오르니까 어느 순간 감당이 안 됐다. 식재료를 바꾸면 음식 맛도 변할 텐데 싶어 고민했다. 값을 올릴까 생각도 해봤는데.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결국 국산 재료를 쓰면서 최대한 기존 가격에 맞추기 위해 우거지얼큰탕 단품만 팔게 됐다.

―우거지얼큰탕 값을 9년간 2000원으로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뭔가.

▷많이 파니까 견딜 수 있는 거다. 몇십 년 동안 한자리에서 계속 식당을 운영하다 보니 그동안 쌓아올린 고객층이 아주 두껍다. 손님들이 맨날 와주니까 유지가 된다. 처음 장사를 시작하는 가게가 우리처럼 할 수는 없다.

―물가와 인건비는 매년 오르는데, 낮은 가격을 고수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냥 나는 값을 올리는 게 그렇게 힘들다. 단돈 100원 올리는 것도 쉽지 않다. 단골손님들이 오랜 시간 우리 집 음식을 사랑해줬다. 그런 손님들이 올라간 가격표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걸 생각하면 싫다.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안 올린다.

―그래도 남는 게 별로 없지 않나.

▷이제는 진짜 마진이 얼마 안 남는다. 10년 동안 쌀값도, 채소값도 족히 2배는 올랐다. 인건비랑 전기세만 해도 하루에 수십만 원이 나간다. 그래도 이 가게 그만할 때까지 가격 2000원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솔직히 이쯤 되니 `이 나이에 돈 많이 벌어서 뭐하나` 싶다. 애들도 이미 다 키웠고. 지금은 우리 식당을 그동안 찾아준 손님에게 너무 감사해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감사한 마음으로 식당을 운영하니까 다른 데서 복이 오는 것도 같다. 내가 국자로 국물 푸면서 맨날 `우리 딸·아들 잘 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그랬더니 삼남매가 다 잘 자라줬다.

―가게 일 하랴, 삼남매 키우랴 고생이 많았겠다.

▷없는 살림에 일하랴, 애들 키우랴 고생이 말도 못 했다. 젊었을 때는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꽉 채워 일했다. 새벽에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악착같이 시장을 돌아다녔다. 지금껏 명절 빼고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삼남매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도 한 번을 못 갔다.

―고된 하루를 견디게 한 버팀목은 뭐였나.

▷남들처럼 살고 싶었다. 아버지가 어릴 때 고급 음식점에 야채를 배송하는 일을 했다. 아버지가 아침에 채소를 납품하면 내가 학교 다녀오는 길에 교복 입고 가방 들고 수금하러 다녔다. 그때 학생이라 참 무시를 많이 당했다. 그러고 음식점 밖으로 나올 때면 멋진 까만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나도 언젠가 저런 것을 타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학 갈 나이가 됐는데 친정 경제 사정이 좋지 못했다. 결국 영문과를 졸업해 동시통역사가 되겠다는 꿈은 못 이뤘다. 결혼하고선 외부와 단절하고 오직 일만 하고 살았다. 아무도 안 만나고 일만 하니까 손님들이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와서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냐고도 했다. 근데 일하고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하더라. 내가 처녀였던 시절에는 여자가 일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많이 바뀌어 참 다행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돈 벌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일할 기회가 있었으니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요즘에도 새벽마다 시장에 가고 하루 종일 일하나.

▷나이가 많아서 예전처럼 못 움직인다. 그래도 과거에 발품 팔아놓은 곳이 다 오랜 단골이 됐다. 이젠 거래처에 전화만 하면 알아서 착착 좋은 제품을 가져다준다. 출근도 오전 8시 30분으로 늦어졌다. 새벽에는 시누이가 나와서 해장국을 끓이고 4시 30분부터 아침 손님을 받는다.

―새벽에는 주로 어떤 손님이 오는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택시기사와 일용직 노동자들이 주로 많이 온다. 새벽 내내 술 마신 사람들이 해장하러 오기도 한다. 내 가게는 사실상 `인간 학교`다. 오가는 손님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삶을 공부할 수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을까.

▷하도 많이 떠올라서…. 흘러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네. 자주 오던 단골이 오래 안 나타나서 수소문해 봤더니 하늘나라 간 적도 있고, 잘나가던 사장님이 갑자기 차림이 허름해져서 온 적도 있다. 아! 고급 외제차에 비싼 옷을 입고 오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아무리 부자여도 자식들이 한번을 같이 오지 않았다. 참 외로워 보였던 분이다. 이분은 실버타운에 들어가신 후에도 우리 집 음식이 먹고 싶다며 사람을 보내곤 한다.


―5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손님의 면모도 많이 바뀌었겠다.

▷1980~1990년대만 해도 근처에 관공서랑 은행이 몰려 있어서 공무원들이 많이 왔다. 1990년대 후반 IMF(외환위기)가 터지고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는 일반 손님이 많았다. 요즘에는 어렸을 적 부모님 손을 잡고 오던 어린애들이 장성해서 자기 자식이나 회사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그럴 때면 얼마나 뿌듯하고 반가운지 모른다.

―어린 손님이 이젠 유명 인사가 된 경우도 있겠다.

▷당연하다. 어릴 때 보던 애들이 잘되면 내 일처럼 너무 좋더라. 한 유명 엔터테인먼트 기업 대표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어릴 적에 우리 가게에서 밥을 많이 먹었다면서 찾아왔다. 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 중 하나도 예전부터 우리 집에 왔었고 올해 이낙연 국무총리도 와서 국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 갔다. 유명인이 올 때마다 사인을 받았으면 가게 벽이 사인 액자로 가득 차고도 남았을 거다.

―간판에 `송해의 집`이라고 쓰여 있다. 송해 선생님도 자주 오시나.

▷지금도 이 근처에 오시면 꼭 방문하신다. 송해 선생님이 가게에 처음 방문한 게 거의 30년 전이다. 예전에 종로 극장 근처에서 활동할 때 매일 식사를 여기서 많이 해결하셨다. 오죽하면 간판에 `송해의 집`이라고 달았겠나. 송해 선생님이 직접 써넣으라고 먼저 말하셨다.

―탑골공원 어르신들도 주요 고객인 듯하다.

▷나이 드신 분들은 여기서 소주를 함께 마시며 친해지기도 한다. 주말에는 젊은 손님도 많이 온다. 나는 볼 줄 모르는데 우리 집이 인터넷에 많이 소개돼 있다고 하더라. 근데 막상 와서 그냥 가는 젊은이도 있다. 아무래도 가게가 오래돼서 좀 허름하니까 막 지저분하다고 안 들어온다. 하지만 꼭 말하고 싶은 게 우리 집은 국을 가게 앞에서 끓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 내가 음식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볼 수 있다. 얼린 식재료를 대충 뚝배기에 넣고 끓이거나 주방 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식당도 많은데 우린 투명하게 관리한다. 우거지얼큰탕, 깍두기, 밥. 딱 3개만 집중 관리하기도 한다. 나는 누구보다 자신 있게 음식을 내놓는데 꺼려하는 게 느껴지면 좀 그렇다.

―진상 손님 대처법이 있다면.

▷하루 종일 손님을 상대하다 보면 당연히 열 받을 때도 있다. 그런데 예전부터 나는 특이하게도 술 먹은 사람들을 안아주고 진정시키는 재주가 있다. 가만 보면 참 착하고 따뜻한 사람인데 왜 저렇게 술을 마시고 힘들어할까 싶어서 달래주면 그게 통하는 것 같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손님들이 대부분 참 좋다. `에이 그만둘까` 하다가도 손님이 "진짜 맛있다, 잘 먹었다" 해주면 바로 `안 하면 안 되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이 아주 변덕스럽다.

―손님들이 많이 찾는데, 하루에 몇 그릇이나 파나.

▷계절과 요일에 따라 많이 달라져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통상 가을철에 가장 많이 파는데 하루에 대형 솥을 한 다섯 통 정도 비우는 듯하다.

―가게는 언제까지 운영하고 싶은지.

▷사실 갈수록 몸이 힘드니까 작년에 가게를 세주려고 했다. 음식을 다양하게 하되 이 가게의 기본은 그대로 이어가 달라고 했다. 그런데 세를 준 사람이 딱 일주일 하더니 못하겠다고 하더라. 돈을 벌긴 버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겠다고. 그 후로 내가 다시 가게를 맡아서 운영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이제는 세를 줘도 가게를 이어가 달라고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 가게가 아예 문을 닫는 거니까. 슬퍼서 놓지를 못하겠다. 평소 명절 딱 이틀 쉴 때도 손님이 왔다가 `아이고 문 닫았네` 하고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자식들은 이제 그만하고 제발 편히 살라고 하는데…. 앞으로도 힘 닿는 데까진 해볼 생각이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우리 집 음식을 수십 년간 사랑해준 단골들에게 죽기 전에 봉사라도, 아니 손잡고 마음 표현이라도 꼭 하고 싶다. 너무 감사하다고. 행복했다고.

▶▶ She is…

1947년 2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소문난집국밥은 1951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권 사장은 결혼한 뒤인 1972년부터 시어머니가 운영하던 소문난집국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게를 물려받아 47년째 운영 중이다.

[이희수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ll rights and copyright belongs to author:
Themes
I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