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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 대학 없애 평등 실현” vs “인재양성 포기땐 국력 약화”[글로벌 포커스]

‘엘리트 산실’ ENA 폐교에 찬반 뜨거운 프랑스
12일 오후 4시 프랑스 파리 6구에 위치한 국립행정학교(ENA)파리 캠퍼스. 내년 폐교 계획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봉쇄조치가 겹치면서 한산해진 모습이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12일 프랑스 파리 6구 뤽상부르 공원 앞에 위치한 ‘대표 그랑제콜’ 국립행정학교(ENA)를 찾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포함해 대통령 4명과 총리 9명을 배출한 명문 교육기관으로 1945년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이 설립했다. 1991년 본관을 북동부 스트라스부르로 이전했지만 파리 캠퍼스에도 일부 교육 과정이 남아 있다.

학교 앞은 조용했다. 8일 마크롱 대통령이 직접 “내년에 ENA를 폐교하겠다”고 밝힌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조치 등으로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려 해도 손사래를 치며 피했다.

ENA에서 약 2.6km 떨어진 시앙스포(Sciences Po·파리정치대학)로 이동했다. 시앙스포 졸업생 중 약 절반이 ENA로 진학한다. 프랑스에서 시앙스포와 ENA를 모두 거쳤다는 것은 일종의 출세 보증수표로 통한다. 그래서인지 이날 시앙스포 재학생들은 향후 자신이 진학할 가능성이 높은 학교가 없어진다는 점에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재학생 엘레나 씨는 “마크롱 정권이 대안도 내놓지 않은 채 무작정 ENA를 폐교하려 한다”고 말했다.

○ 그랑제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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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위의 대학’으로 꼽히는 그랑제콜(Grande ´ecole)은 일반 대학교(Universit´e)와 구분되는 프랑스 특유의 소수정예 고등교육기관이다. 인문 이공 상경 등 각 분야의 최고 인재를 육성하는 일종의 특수목적 대학이다. 영어의 그랜드 스쿨(Grand School)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혁명 후 나폴레옹 황제는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만으로 엘리트를 선발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군사기술, 토목, 공학 분야의 그랑제콜을 속속 설립했고 이후 인문 상경 정치행정 등으로 분야가 넓어져 현재 250여 개가 있다. ‘프랑스의 MIT’로 불리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1794년 설립돼 227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정치행정 분야에서는 ENA와 시앙스포, 이공계에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에콜 상트랄, 상경 계열에서는 고등경제상업학교(ESSEC)와 파리고등상업학교(HEC), 인문교육 분야에서는 고등사범학교(ENS) 등이 특히 유명하다. 입학 과정은 험난하다. 우선 일반 대학시험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중등과정 졸업시험)에서 상위 4% 이내에 들어야 한다. 이 소수의 학생이 그랑제콜의 예비학교 격인 ‘프레파(CPGE)’에서 2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후 공통의 선발 시험을 치른다. 이 성적을 각 그랑제콜의 입학 정원에 적용해 성적순으로 입학한다. 에콜 폴리테크니크(500명)를 제외하면 주요 그랑제콜의 선발 정원은 각각 80∼200여 명에 불과하므로 성적이 좋아야 원하는 그랑제콜에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입학만 하면 꽃길을 걸을 수 있다. 그랑제콜협의회(CGE) 통계에 따르면 그랑제콜 졸업생의 89.4%는 6개월 이내에 직장을 구한다. 75%는 직장과 종신 계약을 맺는다.

최고권력자도 모두 그랑제콜 출신이다. 1958년 제5공화국 성립 이후 취임한 대통령 8명 중 드골(생시르 육군사관학교)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모두 그랑제콜을 졸업했다. 마크롱, 프랑수아 올랑드, 자크 시라크,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은 ENA, 프랑수아 미테랑과 니콜라 사르코지는 시앙스포, 조르주 퐁피두는 고등사범학교를 나왔다. 특히 마크롱, 올랑드, 시라크는 시앙스포와 ENA를 모두 거쳤다. 지스카르데스탱은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거친 후 ENA에 왔다. 그랑제콜 졸업생이 아니면 대통령을 넘볼 수 없는 일종의 ‘그랑제콜 공화국’인 셈이다.

○ 그랑제콜의 그랑제콜 ‘ENA’


특히 ENA는 ‘그랑제콜의 그랑제콜’ ‘그랑제콜의 끝판왕’으로 불린다. 연간 80명 내외만 선발하므로 프레파 최상위권 학생이 지원해도 지원자 대비 합격률은 6∼8%에 그친다. 입학 때 일반 대학교 3학년 정도의 학력 수준을 요구하기에 시앙스포 등 다른 그랑제콜을 거친 학생들이 주로 들어온다. 입학생 평균 연령 또한 20대 중후반이 넘는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연간 3000여 명을 선발하는 영국 옥스퍼드대, 2000여 명을 뽑는 미국 하버드대보다 ENA를 들어가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진단했다.

ENA 재학생은 입학과 동시에 공무원 신분을 보장받고 매월 1682유로(약 224만 원)를 받는다. 졸업 후에는 정부에서 10년간 일해야 한다. 졸업 성적순으로 원하는 부서에 배치되므로 정부는 우수한 엘리트를 쉽게 확보할 수 있고 학생들 또한 안정적으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다. 수업 대부분은 연간 3000명에 달하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철저한 실무 교육으로 진행한다. 이 전문가의 상당수가 ENA 동문이다. 재학 때부터 인맥을 쌓을 기회가 제공되는 셈이다.

ENA 뒤에 ‘군주(monarch)’를 뜻하는 접미사를 붙인 ‘에나르크(´enarque)’ 즉 ENA 동문은 정재계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마크롱 내각 또한 에나르크 내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 장 카스텍스 총리, 알렉시 콜레르 대통령비서실장,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장관,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장관, 프랑수아 빌루아 드갈로 중앙은행 총재 등 내각의 핵심 관료가 모두 ENA 출신이다. 한국계 입양인 출신으로 프랑수아 올랑드 정권에서 프랑스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장관을 지낸 플뢰르 펠르랭 전 중소기업·디지털 경제장관(48)도 동문이다.

ENA를 졸업하면 20대 중후반에 경제부, 중앙은행, 감사원, 행정위원회 등 정부 주요 기관에 간부급으로 채용된다.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30대 초중반에 정계에 입문하면 역시 ENA 출신의 선배 정치인이 발탁해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장관에 오른다. 바로 마크롱 대통령이 밟아온 길이다. 파리 낭테르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마크롱은 시앙스포를 거쳐 2002년 ENA에 입학했다. 졸업 후 경제 부처 고위 공무원,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의 인수합병(M&A) 임원으로 일했다. ENA 선배인 올랑드의 경제보좌관으로 발탁된 그는 올랑드가 대통령이 되자 2014년 37세에 경제산업장관에 올랐다.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과정에서도 동문들의 전폭적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 ‘그들만의 리그’ 비판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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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과정에서 독점적 카르텔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랑제콜 출신들이 사회 곳곳에서 촘촘한 네트워크를 구축해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대다수 그랑제콜 졸업생이 자녀 또한 그랑제콜에 보내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경향도 뚜렷하다.

프랑스 공공정책연구소(IPP)에 따르면 현재 그랑제콜 입학생 중 저소득층 자녀는 9%에 그친다. 임원, 전문직 부모를 둔 학생은 약 70%다. 1950년대에는 상류층 입학생 비율이 40%대였지만 70년 만에 배 가까이 늘었다. 기업인으로 한정해도 고위 임원의 자녀는 일반 직원의 자녀보다 12배 많이 그랑제콜에 진학했다. 파리 등 수도권 학생의 입학 가능성 또한 지방 학생보다 3배 높다.

이는 지원자의 사회경제적 배경 대신 오로지 점수만으로 입학생을 선발하는 그랑제콜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2년간의 프레파 과정을 버텨내고 피 튀기는 입학 경쟁 또한 지원받을 가능성이 높은 상류층, 수도권 출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란 의미다. 한 ENA 재학생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동료 학생 대부분이 원래 알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 대선용 포퓰리즘 비판도


2017년 5월 집권 후 한때 60%에 달했던 마크롱의 지지율은 2019년 말 유류세 인하 등을 주창한 ‘노란조끼’ 시위로 20%대까지 하락했다. 당황한 마크롱은 2019년 4월 “평등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시민들이 공공 부문의 최상층에 오르는 방식부터 바꾸겠다”며 ENA 폐교 방침을 처음 밝혔다. 이후 구체안을 발표하지 않다가 올해 2월 “50년 전에 비해 사회의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언급했고 이달 8일 내년 폐교를 공식 선언했다. 이는 최근 프랑스가 서유럽 선진국 중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가 가장 뒤처지고 마크롱의 지지율 또한 30%대로 하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년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그가 ‘모교 폐교’란 초강수를 통해 지지율 반등을 꾀한다는 의미다.

이 카드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랑제콜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재건과 발전에 기여한 순기능, 장기간 최상층 엘리트를 육성해 온 노하우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우파 싱크탱크 사회과학정치경제연구소(ISSEP) 마리옹 마레샬 르펜 소장은 “우수한 공무원을 육성하지 못하면 국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고등교육 준비반 교사협회(Aphec)의 알랭 조이외 회장 또한 “그랑제콜의 긍정적 역할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가세했다. 2009년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 또한 양극화 해소 등을 이유로 ENA 개혁을 위한 법 개정을 추진했지만 여론의 반대로 무산됐다.

동문의 반대도 거세다. 시라크 정권에서 대변인을 지낸 장프랑수아 코페는 재선을 위한 마크롱의 철저한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라고 비판했다. 일부 동문은 “미국이 하버드대를, 영국이 케임브리지대를 억압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느냐”며 분노를 표하고 있다.

마크롱 정권은 ENA 폐교 후 ‘공공서비스연구소(ISP)’란 새로운 기관으로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방안은 다음 달 각료 회의에서 논의한다. ISP를 통해 공무원을 선발하되 다양성 확보 및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복구하고 교육 과정을 현대화해 국제 사회에서 통할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포진한 ENA 동문의 영향력이 건재하고, 교육 이외의 다른 사회 체계를 그대로 둔 채 ENA만 폐교한다면 ISP가 ‘이름만 바꾼 ENA’가 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내년 대선에서 마크롱의 최대 경쟁자로 꼽히는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53) 또한 “ENA 폐교는 결국 학교 이름만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정부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부터 신경을 쓰라”며 반대했다. 대선에서 마크롱, 르펜 대표와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에두아르 필리프 전 총리(51) 또한 시앙스포와 ENA를 동시에 거쳤다. 우파 공화당 출신이었지만 마크롱의 러브콜을 받아 마크롱 정권의 첫 총리를 지낸 필리프 전 총리는 현재 입소스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 인기 정치인 1위를 달리고 있다. 아직까지 대선 출마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으나 그가 집권 여당 앙마르슈를 이끌고 있는 마크롱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모교를 없애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세울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ENA 폐지 논란 자체가 ‘그들만의 고민’이라는 시각도 있다. 파리 15구에 사는 회사원 가브리엘 씨(38)는 “많은 사람들이 ENA를 포함한 그랑제콜 졸업자를 ‘나와 전혀 다른 부류’ 라고 생각한다. 그랑제콜 학생들이 죽도록 공부하고 치열하게 사는 것은 ‘계층’이 아닌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평범한 시민들은 치열한 삶 대신 취미, 가족과의 시간 등을 중시하므로 엘리트 교육을 받는 이들이 벌이는 논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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