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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15] 프랑스王을 쓰러뜨려 발에 키스한 뒤, 바이킹은 스스로 신하가 됐다


-영국 섬에 들이닥친 악마같은 무리
린디스판 수도원 초토화한 바이킹
프랑스 해안 이어 내륙도 침투 시작
샤를 국왕, 바이킹 롤롱과 조약 맺어

-'바이킹으로 바이킹 막기'


롤롱, 노르망디 지역 하사받는 대신
바이킹과 이웃 브르타뉴 공격 막아줘
노르웨이 전사가 노르망디 귀족 변신

-왕의 다섯살 딸과 결혼, '로베르'로 영세


처음엔 토르神과 가톨릭 같이 믿은 듯
후손들은 점차 스칸디나비아 전통 잊어
잉글랜드 침략, 노르만 왕조 세우기도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노르망디,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땅'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초원과 아름다운 작은 숲들, 카망베르 치즈와 능금주(시드르)로 유명한 평화로운 지방 노르망디.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장을 건설한 선조는 오늘날 노르망디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바이킹 집단이다. 노르망디(Normandie)라는 말 자체가 '북쪽에서 온 사람들(Norman, Northman)의 땅'이라는 의미다.

서유럽에서 본격적인 바이킹 시대의 개막 연도는 대개 793년을 든다. 이해에 잉글랜드 북동쪽의 '성스러운 섬' 린디스판(Lindisfarne)에 바이킹 무리들이 들이닥쳐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의 행태가 얼마나 극악했는지, 당시 기록은 종말의 시기가 되어 북쪽의 악마들이 몰려왔다고 서술했다.

악마 같은 무리들은 곧이어 프랑스 해안 지역에도 출몰했다. 처음에는 부유한 성당이나 수도원을 약탈하고 도망가기 바쁘더니, 이 지역의 방어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느긋하게 겨울을 나기도 하고, 급기야 센강을 타고 프랑스 내륙 깊숙이 공격해 들어갔다. 885~887년에는 무려 배 700척에 나눠 탄 바이킹 무리가 파리까지 들어와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프랑스 국왕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바다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외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역량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바이킹 집단에게 땅을 주어 신하로 만들고 이들이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막도록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910년, 또다시 가공할 바이킹 무리가 샤르트르 지역을 공격했다. 이 집단의 우두머리는 고향에서는 흐롤프르(Hr�blfr) 혹은 롤프(Rolf)라고 불렸겠으나 프랑스에서는 롤롱(Rollon) 혹은 롤로(Roll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프랑스 국왕 샤를은 롤롱 집단과 협상을 벌여서 911년에 생클레르쉬르엡트(Saint-Clair-sur-Epte) 조약을 맺었다. 계약 내용은 롤롱이 엡트강(Epte, 파리 서쪽 지베르니 부근에서 센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에서부터 해안까지의 지역을 영토로 받는 대신 프랑스 왕의 신하가 되어 왕국의 방어를 돕는다는 것이다. 롤롱은 또한 기독교 세례를 받고 국왕의 딸 지슬라(Gisla)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했다. 사실 롤롱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고, 또 지슬라는 당시 다섯 살에 불과한 국왕의 사생아였지만, 이런 일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슬라는 분명 국왕의 적출(嫡出)이 맞는다고 선언한 후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을 했다. 조약에는 이웃 브르타뉴 지역을 공략해 들어가도 좋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당시 브르타뉴는 오만하게 독립 왕국을 자처하면서 프랑스 국왕에게 도전하던 터였다.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거칠기 짝이 없는 야만족 전사 집단을 기독교도 귀족으로 만든 후 자기 부하로 삼아서 한편으로 바이킹의 공격을 막고 다른 한편 도전적인 브르타뉴의 준동도 제압하는 '일타쌍피'의 효과를 보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3세(879~929년)에게 바이킹 우두머리인 롤롱이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 국왕의 발에 키스하도록 강요당한 롤롱이 자신의 부하를 부르고 있다. 부하가 국왕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려 국왕을 쓰러뜨린 다음 그 발에 대신 키스를 했다고 한다.‘ 중세 및 르네상스 필사본’에서 샤를 3세 통치와 관련한 부분의 삽화./ 모건 라이브러리 앤드 뮤지엄
프랑스 국왕 샤를 3세(879~929년)에게 바이킹 우두머리인 롤롱이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 국왕의 발에 키스하도록 강요당한 롤롱이 자신의 부하를 부르고 있다. 부하가 국왕의 발을 잡고 들어 올려 국왕을 쓰러뜨린 다음 그 발에 대신 키스를 했다고 한다.‘ 중세 및 르네상스 필사본’에서 샤를 3세 통치와 관련한 부분의 삽화./ 모건 라이브러리 앤드 뮤지엄

노르망디의 탄생은 프랑스나 영국 역사, 더 나아가서 유럽 역사 일반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이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앞서 언급한 생클레르쉬르엡트 조약만 해도 구두 계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사정을 알려주는 기록으로는 생캉탱 지역의 사제인 뒤동(Dudon)이 저술한 노르망디 초기 공작들의 품행과 활동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 이 책은 노르망디 공작들을 찬미하는 성격인지라 과연 어디까지 사실인지 다소 의문이 들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뒤동의 서술이 비교적 정확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영국 노르만 왕조를 세운 바이킹 후손프랑스 국왕과 롤롱이 만나는 장면을 보면 두 사람은 주군(lord)과 봉신(封臣·vassal) 사이에 충성의 맹세를 하는 봉건 계약(hommage)을 맺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의식은 부하 기사가 될 사람이 상위 주군에게 자신의 손을 맡기고, 두 사람이 키스를 하게 되어 있다. 다만 일반적인 사례와 차이 나는 점이 있다면 두 사람이 입으로 키스를 하는 방식(osculum)이 아니라 롤롱이 국왕의 발에 키스하도록 강요당했다는 점이다. 이런 굴욕적인 일을 한다면 바이킹 전사가 아니다. 롤롱은 자기 부하에게 대신 하라고 지시했다. 부하가 국왕의 발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려 국왕을 쓰러뜨린 다음 그 발에 키스를 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분위기가 상당히 조야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롤롱은 프랑스 귀족 집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속대로 다음 해에 루앙 주교에게서 교리문답을 배운 다음 세례를 받아 로베르(Robert)라는 문명인 냄새가 물씬 나는 세례명을 받았다. 노르웨이의 칼잡이 흐롤프르는 프랑스의 로베르 공작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땅의 일부를 분할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준 후 자신은 루앙을 수도로 삼아 통치했다. 로베르 공작은 928~933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말로 신실한 기독교도가 되었을까? 역사가들은 그의 개종이 거의 전적으로 정치적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고 판단한다. 사실 유럽 변방 지역이나 이웃 대륙 각지로 진입해 들어간 다른 바이킹 전사들은 대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오딘이나 토르 신앙에 더해 그 지역의 새로운 신들을 수용하곤 했다. 로베르 또한 원래 자신이 믿던 신과 새로운 신 여호와를 동시에 잘 모셨던 것 같다. 임종의 자리에서 그는 가톨릭 교회의 기도를 받는 것 외에 옛 스칸디나비아 신들에게도 희생을 드렸다.

그렇지만 그의 후손들은 조만간 서유럽 문화를 수용하였고, 반대로 고향 땅의 문화는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공작령이 성립되고 30년이 채 안 지난 940년대 기록에 의하면 루앙에서는 스칸디나비아 언어를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젊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를 아직 옛 언어가 살아 있는 이웃 도시 바이외에 보내 배우도록 했다. 노르망디는 더 이상 사나운 바이킹 전사의 땅이 아니라 세련된 프랑스 문화에 물든 귀족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변신한 노르망디 귀족들은 조만간 잉글랜드로 쳐들어가 새 왕조(노르만 왕조)를 개창하고, 멀리 지중해에 진출하여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며 십자군 운동을 주도하는 등 유럽 각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경계에 자리한 몽생미셸 수도원. 몽(Mont)은 산, 생(Saint)은 성자, 미셸(Michel)은 대천사 미카엘을 뜻한다. 8세기에 주교 오베르에 의해 건축된 이후 12 세기에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요새 역할을 했고, 1789년 프랑스혁명 후에는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됐다./ AFP뉴시스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경계에 자리한 몽생미셸 수도원. 몽(Mont)은 산, 생(Saint)은 성자, 미셸(Michel)은 대천사 미카엘을 뜻한다. 8세기에 주교 오베르에 의해 건축된 이후 12 세기에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요새 역할을 했고, 1789년 프랑스혁명 후에는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됐다./ AF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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